[박예랑]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말

누구나 ‘초보’일 때가 있다.
굳이 ‘저…처음이예요~’를 뒤통수에 쓰지 않아도, 자동차 엉덩이 실룩거리는 것만으로도, 뒤따라오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초보 운전자라는 걸 알아 버리게 하는 것처럼, 어느 사람이든지 서툴고 그저 막막하기만 하던 때가 있기 마련이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처음 운전대를 잡는 순간의 캄캄함이란…하지만 그때 “야~운전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으신데요!”란 운전강사의 빈말임이 뻔한 칭찬 한마디에 좁기만 하던 2차선 도로가 뻥 뚫린 고속도로처럼 보였던 경험을 기억하시는지?
언제나 칭찬이란 듣기 좋고, 들으면 힘이 나는 말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빛을 말하는 순간은 바로 ‘초보’ 일 때다.

작가라는 말을 하기 무색한 ‘생짜초보’ 시절.
며칠 밤을 새워 쓴 드라마 원고를 PD에게 내밀며, 난 숨을 멈추고 PD의 표정에 집중했다.
지금 와 생각하면 방송을 시작하고, 그때처럼 나에게 중요한 순간은 없었던 것 같다. 너무 어린 나이에 철없이 방송을 시작했고, 결국 한계에 부딪쳐 근 2년을 실업자 상태로 쉬고 있던 상황에서 그렇게 기다리던 방송국에서의 연락을 받고 ‘여기에 모든 걸 건다!’라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쓴 대본을 내민 것이다.
‘분명히 좋아 할거야, 난 잘 될 거야!’ 라는 기대에 부푼 내 최면과 상관없이 PD가 읽어 내려가면서 지은 그 어두운 표정에 난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때 나이 25살.
내가 글을 잘 쓰는지 못 쓰는지 조차, 내 스스로 판단하지 못했던 그 시기에, PD의 못마땅한 표정은, 바로 앞에 앉아 PD의 눈빛과 얼굴의 잔주름 하나까지 신경 쓰며 그저 처분만 바랬던 나를 지옥의 불구덩이 속 안으로 밀어 넣었다.
결국, ‘연락 드리겠습니다’라는 말만 듣고,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돌아서 나오면서 ‘난 작가로 더는 안되나 보다…’라는 절망에 그저 눈물만 뚝-뚝 흘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여의도에서 멍하니 걷기 시작한 게 마포대교를 건너 광화문까지 가서야 다리가 아프단 생각이 들었던 그 날…
이제는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쩌면 마포대교 어디쯤에서 퍼런 강물을 내려다보면서 흉악한 생각도 한두번은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며칠 뒤 기적처럼! 그 PD에게서 방송을 하겠다는 연락이 왔고, 난 그 후로 지금까지 감사하리만큼 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분명 연락할 표정이 아니었던 그 PD는 왜 다시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을까?

아주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PD는 내가 사무실을 빠져나가자마자, 내 대본을 책상 한 귀퉁이로 던졌고, 그 대본은 책상을 벗어나 방송국 바닥에 떨어지는 수모를 당했다고 한다.
“이걸 대본이라고!” PD의 이 한마디 말과 함께…
(아~불쌍한 내 대본!)
그때, 맞은 편 자리에 앉아있던 선배 PD가 그 던져진 대본을 들고 자신의 자리로 갔고, 잠시 후-
“이 정도면 뭐 괜찮은데~” 라며 “네가 안 하면 내가 방송할까?” 하며 대본을 자신의 책상 서랍에 넣었다고 한다.
물론 대본을 던졌던 PD는 선배의 손에서 내 대본을 다시 잡았고!
하여간 자기가 하긴 뭐했어도 남이 가져가 잘되는 건 못 보는 가보다. 크크크~
그 후 당연한 순서로 나에게 방송을 하자고 연락 한 것이고, 방송은 그때로서는 단막극인 ‘MBC 베스트극장’에서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며 무사히 끝났다. 그리고, 거기에 멈추지 않고, 그때 단막을 유심히 본 당시 드라마 국장님의 권유로 그 단막은 내 인생을 바꾼 장편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지는 어마어마한 결과까지 불러 일으켰다.

그 드라마가 바로 강남길씨와 심혜진씨가 주연했던 ‘마지막 전쟁’ 이였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그 바닥으로 던져진 대본이 이렇게까지 될 줄 그때로서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곰곰 생각해보면 내 대본을 던졌던 PD도 그 당시에는 훌륭한 대본 하나 제대로 못 판단하는 초보 PD 였던 가 보다. 호호호~
한마디로 나와 마찬가지로 초보였던 PD는 대본을 자신 혼자 판단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선배 PD의 호의적인 칭찬 한마디는 결국 내가 MBC에서 일을 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시간이 흘러, 내 대본을 그렇게 무참히 집어 던졌던 초보 PD는 나와 함께 ‘마지막 전쟁’ ‘영웅반란’ ‘맹가네 전성시대’등을 같이 하며 표정만 봐도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정도의 파트너가 되었고, 내 대본을 집어들어 구사일생으로 날 살려준 선배는 현재 드라마 국장님이 되셨으니, 사람 인생이란 참 한 순간이다 싶은 생각에 웃음도 난다. 하지만, 만일 그때 던져진 대본을 지금의 국장님이 집어들지 않았다면…. 그리고, ‘이 정도면 괜찮네~’라는 말을 하지 않았었다면…. 내가 과연 지금 그때의 상황을 웃어넘길 수 있었을까?

처음 이 원고를 청탁 받았을 때의 부탁은 ‘내 인생을 바꾼 칭찬 한마디’였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예랑이 넌 천재 작가야’ 뭐 이런 거창하고 대단해 보이는 칭찬의 말을 기대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네’라는, 어찌 보면 칭찬 축에도 들지 않는 이 한마디 말은 ‘내 인생을 바꾼’ 정도가 아니라 ‘내 인생을 살린 칭찬’이 되었다.

내 원고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던 그 날, 국장님은 금방이라도 죽을 거 같은 표정을 짓고 돌아서는 내가 안쓰러웠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주 뛰어난 대본은 아니었지만, 그저 한번의 기회를 주고 싶었던 정도였을 수도 있다. 더구나, ‘이 정도면 괜찮네’라는 말조차 내가 직접 들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PD는 나에 대한 판단이 달라졌고, 그 달라진 판단은 나에게 일생을 좌우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결국 그 말 한마디가 아직도 많이 모자라기는 하지만, 그래도 작가로서 ‘예랑’을 있게 해주었고, 인간 ‘예랑’을 살린 격이 되었다.
고작 그 한마디 말이 마포대교를 서성거리던 날 살렸다니!

누군가에 대한 칭찬은 직접적으로 들은 당사자에게 ‘용기’와 ‘자신감’ 그리고 ‘배짱’을 심어주며 앞으로 살아가는데 든든한 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칭찬이 그저 그 사람 앞에서의 ‘서비스’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아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전해 질 때, 칭찬의 대상인 사람에 대한 사회적인 판단자체가 달라 질 뿐 아니라, 그런 칭찬은 듣고 사라지는 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운명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된다.
인간은 결국 사회적인 존재이고, 칭찬을 받은 사람은 달라진 평가로 인해 사회 안에서의 자리를 확고히 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 누군가를 칭찬하고 싶다면, 그 당사자에게만이 아니라 널리 널리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기를 바란다. 돈 한푼 안 드는 당신의 그 말 한마디로 이렇게 한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 뿌듯한 일인가 말이다!
혹시 마음 뿌듯한 거 정도로는 모자라신다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당신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든든한 편을 만드는 일이라고…

지금 당신이 여러 사람에게 칭찬을 하는 사람은 앞으로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 옆에 서서 편을 들어주는 ‘울타리’가 되어 줄 것이다.
세상에 목숨을 살린 ‘생명의 은인’을 편들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말이다!
만일 당신에게 억울하고 분할 일이 생겼을 때 당신의 옆에서 당신과 한 목소리로 함께 싸워줄 당신의 편이 계속해 생긴다고 상상해보자. 이 얼마나 멋지고 근사한 일인가!
그리고, 결국 당신에게 칭찬을 받은 사람도 당신을 주위에 칭찬하고 다닐 것이며, 그렇게 당신은 ‘칭찬 받는 사람’ 으로 사회적인 위치를 점점 더 단단히 할 것임이 분명하다.

아~생각해보니, 나부터 나를 든든하게 지켜줄 울타리를 더 많이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 겠다.
어디 동네방네 칭찬 할 사람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