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철] 우연 <3>

우연 #3

철이: 학기초라 들뜬 기분 때문에 도서관을 가지 못했지요. 그래서 그녀를

      일주일동안 보지를 못했읍니다. 교양시간이 많이도 기다려지더군요.

      교양수업이 시작하기 20분전쯤에 강의실로 갔습니다. 앞 자리쪽에 가방을

      던져놓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얼마후면 그녀가 나타나 제 근처에 자리를

      잡을거라 기대를 했습니다.

      강의실앞문쪽에 시선을 두고 그녀만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냐구요? 그녀의 모습이 보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침에 얼룩져 버렸던

      그녀의 책도 새로 하나 샀습니다. 생각보다 비싸더군요.

      한참을 기다렸는데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혹 수강변경이나 해버리지 않았나 걱정도 되었습니다.

      결국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강의는 시작되고 말았습니다.

      그녀를 못 보나 했는데 그건 아니었습니다. 수업이 끝났을때

      복도에서 그녀를 보았습니다. 친구와 같이 있더군요.

      친구와 같이 가는 그녀에게 말을걸어 책을 주기는 그랬습니다.

      더군다나 그녀의 책이 아니라 새로 산 책이니 말입니다.

      할수 없습니다. 다음에 보게되면 주어야 겠습니다.

      미안하다는 글도 하나 적어 같이 주어야 겠습니다.

민이: 학기초라 여기저기 불려다녀 도서관을 가지 못했답니다.

      이번주 전공수업은 책없이 강의를 들어야 했습니다.

      드디어 한민족의 역사라는 교양과목이 있는 날이 돌아 왔습니다.

      그 교양은 그와 같이 듣는 수업이지요.

      기대가 됩니다.

      교양수업이 시작하기 30분전쯤에 강의실로 갔습니다.

      친구가 앞자리도 많이 비었는데 왜 굳이 뒤에가 앉느냐고 따지더군요.

      그럴일이 있단다. 이 기집애야.

      친구와 커피를 한잔 뽑아 강의실 뒷문 계단쪽으로 가 잠시 수다를 떨었습니다.

      수업이 시작할 무렵 약간은 설레이는 맘으로 강의실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내 근처에 앉아 있을것만 같았거든요. 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 그가 수강변경이나 해버리지 않았나 걱정이 되더군요.

      하지만 그건 아니었습니다. 수업이 끝났을때 저기 앞쪽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도서관에서처럼 일정한 자리에 앉지 않았습니다.

      복도에서 그와 마주쳤는데 또 횡하니 가버렸습니다. 아주 모르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분명히 날 알텐데 말입니다. 진짜로 날 모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에이 설마 방학때 그렇게 도서관에서 자주 보았는데…

      책은 그래서 받지못했습니다. 아무래도 그책은 새로 사야겠습니다.

철이: 오늘 우연찮게 그녀를 만났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친구를 붙잡아

      뒷자리를 신세졌었습니다.

      사대앞 내리막길을 신나게 내려갔었지요. 지나치는 가을냄새가 상큼했습니다.

      그런데 자전거모는 놈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더니

      핸들을 한쪽을 홱 틀었습니다. 어떤 여학생이 갑자기 튀어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하. 그 여학생은 바로 그녀더군요.

      다행히 그녀를 치인 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자전거 운전한 친구에게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멋모르고 뒷좌석에서 손놓고 있던 나만 공중에 붕 떴다가 한바퀴 굴렀지요.

      속력 때문에 난 그녀가 서있던 바로 앞에까지 굴러가 쳐박혔습니다.

      치마입은 그녀의 다리가 참 예쁘더군요. 손바닥에서 피가 났습니다.

      하지만 아픈줄을 몰랐습니다. 왜냐면 쪽팔렸기 때문입니다.

      주위에 사람들까지 모여들었습니다. 얼굴을 못들겠습니다.

      그녀가 보는앞에서 이 무슨 창피냐…

      저기 떨어진 내 가방을 주워 들고는 차마 그녀의 얼굴은 쳐다보지 못하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날 보고 있는 자전거운전수놈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고

      죽어라 뛰었습니다.

민이: 오늘은 큰일날뻔 했습니다. 사대앞 내리막길에서 길건편 친구가 부르길래

      무심결에 길을 건너다가 급히 내려오는 자전거에 치일뻔 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그 자전거는 내 바로앞에서 멈추었지만 뒷좌석에 타고 있던 남학생하나가

      날라서 내 바로 앞에 떨어졌습니다.

      이런 내 앞에 떨어진 남학생은 바로 그였습니다. .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정도로

      그는 심각하게 자전거에서 떨어져 굴렀습니다. 갑자기 맘이 아프더군요.

      손을 잘못 짚었는지 손바닥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그는 많이 아팠는지 한동안 얼굴도 못들었습니다.

      난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줄려고 했습니다.

      근데 그는 자기와 같이 떨어진 가방을 들고는 단지 주먹만 쥐어보이고

      뭐가 급한지 엄청 빠르게 뜀박질하여 멀리 사라져 갔습니다.

      손수건을 들고 한동안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봤습니다.

철이: 오늘은 교양수업이 있는 날입니다.

      자전거에서 떨어져 생긴 손의 상처는 거의 아물었지만 창피당했다는 마음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습니다. 그녀 볼일이 막막합니다.

      그래도 수업은 들어가야겠지요. 하지만 책은 주지 못하겠습니다.

      강의실 앞좌석 한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내 앞자리에는 가방 몇개만 남겨놓고

      주인들은 어디를 나갔나봅니다.

      앗 그 가방들의 자리는 그녀일행들의 자리였습니다.

      수업이 시작할 무렵 그녀와 그녀친구가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와 그자리에 앉더군요. 좀 머쩍어 했습니다.

      제법 긴 머리 때문에 그녀의 하얀목은 볼수가 없었지만 대신 그녀머리결의 향기를

      맡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큰 실수는 하긴 했나봅니다. 그녀가 시위를 하듯이

      수업과 전혀 상관없는 전에 내가 베고 잠이들어 침으로 얼룩지게 만들었던

      그책과 같은 책을 꺼내어 놓았습니다.

      책표지사이에는 크게 9243** 일교과 소수민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소수민은 그녀의 이름인가 봅니다.

      하하 그녀는 약간 공주병이 있나봅니다. 저렇게 크게 자기이름을 광고하는걸 보면

      말입니다.

      내가 사놓은 책과 또한 그녀의 예전 그책은 이젠 어떡하지요?

      이름도 그녀처럼 예쁩니다. 소수민. 소수민? 소수민…

      근데 속으로만 중얼거린다는게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더니 “예?”라고 그랬습니다.

      하하 그것이 그녀와의 첫대화였습니다.

      때마침 교수가 우리민족은 동북아의 소수민족 만주족이 한반도쪽으로 남하하여…

      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난 그녀에게 “족.”이라고 대답해 주었지요.

      뭔가 기분나쁘다는 인상을 나에게 주더니 아까 그녀의 이름이 적힌 그 책에다

      무언가 적고는 나에게 잘 보이는 쪽으로 옮겨놓더군요. 그 책을 보았습니다.

      그 책에는 새로이 여덟자가 적혔있었습니다.

       “할.수.없.이. 새.로.산.책”

      책내놔란 무언의 시위란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책을 안들고 왔는데 어떡하지요?

      그렇게 그날은 그녀의 바로 뒷자리에서 교양수업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제

      도서관처럼 이자리를 제 고정자리로 할렵니다.

민이: 오늘은 교양수업이 있는날입니다. 그때 자전거사건 이후로 아직 그를

      못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를 볼수 있겠군요. 손은 괜찮을까요? 이번엔 혹시나하고 앞자리에다

      자리를 맡았습니다. 그가 저번에 앉았던 바로 앞자리입니다.

      그에게 내가 그가 앉았던 자리근처에 자리를 잡았다는 인상은 주기싫었기에

      친구를 꼬셔서 커피를 마시러 나갔습니다.

      강의실로 돌아와보니 반갑게도 그는 내바로 뒷좌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오늘도 이 교양수업은 출석을 부르지 않는군요. 수강생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교수는 출석 부를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는 아직 내 이름을 모를것입니다. 난 책에다 이름을 적지 않습니다.

      단지 글자를 알아볼수 없는 사인만 해놓지요.

      그러나 난 그에게 내 이름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교수가 출석을 불렀다면

      굳이 이런짓을 하지 않아도 될텐데… 그가 주지 않아 새로산책에다 크게

      이름을 적어 밖으로 내어 놓았습니다.

      충분히 그가 이책의 내이름을 볼 수 있을겁니다.

      호호 역시 그는 내이름을 보았나봅니다.

      소리는 작았지만 분명 그의 입에서 내이름 석자가 불리어 졌습니다.

      나도모르게 뒤돌아 “예?”라고 답해버렸지요.

      에그 쑥스러워라… 근데 그는 약간 멋적은듯 멀뚱거리더니 “족”이라고 답했습니다.

      무슨뜻인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교수가 강의하는 내용에서 소수민족이라는 단어를

      듣고서야 그가 내이름가지고 놀렸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좀 분했습니다.

      책도 안돌려 주고 그가 좀 얄밉더군요. 그래서 책에다 다시 열네자를 썼습니다.

       “네가 주지않아 할수없이 새로산책”

      앞에 여섯글자는 연필로 아주 작게 썼습니다

      그리고 조금 지나 지워버렸구요. 내가 무슨 짓하나 모르겠습니다. 자기이름은 뭐

      그렇게 좋나? 혜철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구나… 그가 좀 얄미웠던 건

      사실이지만 다음주부터 이자리는 제자리가 될것 같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