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순수의 시대"를 보고…
우선 <순수의 시대>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지금까지 수업시간에 토론하고 공부 해온 것들에 대해 잠깐 살피고 넘어가고 싶다. 지금까지 수업 해온 영화들의 공통점 중 첫째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와 사회 속 개인의 존재"에 다룬 영화라는 점이다. 물론, 미국이라는 나라에 국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회적인 보편성을 다룬 면에서는 우리의 현실과 다를바 없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결혼"에 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결혼"이라는 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면서도 개인과 사회를 연결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연결고리이고, 그 사회를 단적으로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게 "결혼"이기 때문인 것 같다. <순수의 시대>는 이런 ‘결혼’이라는 문제에 대해 이전 영화들 보다 좀더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난 <순수의 시대>의 제대로 된 감상을 위해서는 <Gatsby> 때와 마찬가지로 제목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내내 "왜 이 영화의 제목은 <순수의 시대>이고, ‘과연 누가 순수한 걸까’ 라고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영화는 그리 순수하지 않다. <순수의 시대>에는 잊어버린 지난 시절의 순수했던(?) 사랑이야기들은 없고, 단지 허위와 위선만이 가득한 뉴욕 상류사회의 모습들만 있을 뿐이라는게 나의 결론이다.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땐 단순한 삼각관계의 멜로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방황하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그리 단순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다들 너무나 전통과 관습에 얽매여 있었다. 이런 "관습과 개인의 욕망 그리고 전통과 개인의 열정 사이의 갈등"이 영화 갈등구조의 가장 주된 줄기이다. 아처는 엘렌과 같이 있고 싶었지만 자신의 안정적인 직업과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고 가문에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엘렌은 자신의 이혼 문제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하고 아처 옆에 있어야 할지 떠나야 할지, 현재 자신의 모습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고, 메이는 가정이라는 신성한 굴레를 계속 지키길 간절히 원했기에 모든 것을 인내해야만 했고 모른 척 해야 했다. 그들은 결혼이라는 사회 관습을 벗어난 일탈들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일임을 잘 알고 있기에 더 많이 방황하고 힘들어 했다. 세 사람에게 결혼이 갖는 의미는 ‘속박과 굴레’라는 공통점이 있긴 하지만 약간씩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아처에게 결혼은 벗어나고 싶은 굴레이면서, 자신의 안정된 지위와 명예와 가문을 지켜주는 도구이고, 엘렌에게 결혼은 인생의 오점이면서 자신의 자유분방함을 옭아매는 골칫덩어리이다. 더군다나 엘렌은 한 번의 실패가 있기 때문에 아처와의 사랑에서 결혼이라는 어떤 결과물을 예상하는 것을 꺼려한다.
하지만, 메이에게는 결혼이 조금 다른 특별한 의미이다. 결혼과 가정은 지금 상태와 이유가 어찌됬든 간에 그녀가 끝까지 사수하고 보호해야하는 신성한 틀(보금자리)이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인내하면서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렇게 인내하고 숨겼던 것은 아마도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아처의 영혼에 대한 죄의 사함까지 바래서 였을 것이다.
사랑 없이는 소용이 없지만, 사랑만으로도 안 되는 게 결혼이다. 결혼에 대해서 정해놓은 틀과 관습들이 사랑만으로 안 되는 부분을 채워주는 보완재이긴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것들이 진정한 사랑을 막는 장애물이 되고 인생의 짐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그들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어버린 그 관습들과 체면들을 벗어나고 극복할 용기와 과감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결국 안정권의 궤도에 머물러 살 수 밖에 없었다. 용기와 과감성이 부족했다는 것은 아처와 헬렌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다는 이야기와 세 인물들의 자신의 현재 사회적 지위와 체면에 대한 집착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기에 과감히 사랑이라 부를 수도 없고, 그들은 위선적일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아처에 대한 엘렌의 사랑도 진실된 사랑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영화내내 아처를 만나는 엘렌은 어딘가 계속 피곤해 보였고, 아처만큼 간절한 것 같지도 않았다. "사랑하기에 떠난다" 말이 그녀가 아처의 사랑을 거절하고 떠난 것을 전부 설명해 주지 못한다. 아처가 자신 때문에 많은 것을 잃을 것을 염려하기도 했지만, 자신을 위해 배려해 준 친지들의 신뢰를 져버리지 않기 위한 의무감과, 착하디 착한 메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일종의 책임감 때문에 앨렌은 아처 곁을 떠났을 것이다. 그런 의무감과 책임감을 자기 희생으로 볼 수도 있지만 책임감과 의무감을 발휘해야 한다는 그것 또한 엘렌을 옭아매고 있던 또다른 도덕적 속박과 관습의 굴레가 아니였을까?
그들은 모두 관습과 전통이라는 껍데기에 제재를 받고, 도덕이라는 이름 하에 사랑을 희생하면서 살았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철저히 숨기며, 자신의 관습과 부질없은 체면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런 것을 감안할 때 "순수의 시대"는 그런 전통과 관습에 얽매인 "위선의 시대"를 가장 잘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Es 01.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