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파스] 나는 아직도….

현재 활동하고 있는 동호회에 계신 분이 적은 글입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의 글을 함부로 옮겨서는 안 되나…

꼭 간직하고 싶은 글이라…

그 분의 슬픈 사랑이 애절하지만서도 부러워서…

그렇게 심지있게 사랑하고 싶어서…

이렇게 옮겨봅니다.

그 분의 사랑에 아름다운 쉼표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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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월요일 점심 식사 약속 때문에 여의도를 갔다가

1시경 디리리 걸려온 핸펀 한 통.

LA에서 바다 건너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열달만에 듣는 목소리인데 별로 밝지 못했던 이유는

할머니께서 일요일밤 돌아가셨기 때문.

날더러 장례식장에 가달란 이야기는 안했지만

애사는 무조건 챙기는 게 원칙인지라

일을 모두 마친 저녁에 아산병원 장례식장으로 차를 몰았다.

부모도 아니고 할머니라 그런지 같이 노래하던 친구들이

이런저런 이유때문에 오지 못하고 나만 가게 되었다.

연습이 안 되어 모임이 없으니 다들 마음마저 떠난 건가.

하지만 나는 꼭 그 자리에 있고 싶었다.

그녀가 누군가. 지금까지 내가 혼자이게 한 결정적인 이유다.

그녀에 대한 내 감정을 다들 환히 알고 있는

같이 노래하던 아카펠라 팀에서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와

결혼하고 또 일년이 채 되지 않아 갈라서면서

결국은 내 가슴에 두번이나 못을 박았던 여자.

나는 그때 결혼식에 참석하여 축가까지는 불렀지만

피로연까지 가서 우인들이 시키는 야한 게임까지

웃는 낯으로 볼 배짱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막상 자신은 머나먼 땅에 있고

성수기라 비행기표도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내게 전화를 하는 그녀를

나는 무조건 받아들일수 밖에 없다.

차에서 잠깐 새우잠을 자고 새벽 6시 발인하여

벽제승화원에서 화장을 한 다음

무악재 위의 한 사찰에 유골을 모시고

49재까지 거기서 봉안한 다음 납골을 한단다.

이미 중풍으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한

그녀의 아버지가 처연한 모습으로 사찰까지 나왔다.

아들 친구들과 내가 달라붙어 휠체어째 들어서

3층의 불전까지 끌어올리고 내렸다.

(그녀의 부모님은 거의 십년이 다 되도록 별거중이다)

미국에 가 있는 그녀는 장녀지만 여기에 없어

아들과 딸이 드러누운 아버지 병수발을 하고 있다.

49재 탈상 즈음 해서 그녀가 서울에 올 텐데

그때 무슨 말로 위로를 할까.

그녀가 처한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있는 나는

내게 다시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녀뿐 아니라 그녀의 모든 조건까지도 받아들일 것이며,

그것은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녀도 다 알기에 나를 대하기 어려운 것이리라.

올해 내 나이 사십.

아직 그녀를 사랑할 만한 힘이 남아있을 때

모든 걸 떨치고 돌아와주었으면 좋겠다.

        파.파.스.머.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