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11
철이: 역시 나는 캐주얼이 잘 어울립니다. 스포츠머리에 핸섬한 얼굴… 이의
제기하시는 분들 우리어머니한테 물어보세요. 할일도 없는데 도서관이나 가
볼랍니다. 자전거 친구녀석은 자길 혼자두고 집에 가버렸다고 엄청 열받아
하더군요. 내가 일어났을때 그는 없었는데… 그녀석하고 도서관 휴게실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제법 늦은 오전이지만 방학이라 도서관에 학생들이 없네요. 어라? 호호 아니지
하하. 그녀가 예전에 그녀가 앉던 자리에 있네요. 또 주무시고 있군요. 훗.
지나쳤던 예전 일들을 떠올리게하는 그리움이 담긴 모습입니다. 한동안 서서
그녀를 보았습니다. 휴게실로 왔습니다. 커피가 또 맹물이군요. 방학때는 관리를
잘 안하나 봅니다.
친구가 왔습니다. 그도 평상복입니다. 그가 나를 본체만체 자판기 앞으로 가서
동전을 집어 넣는군요. 그래 집어넣어봐라. 녀석이 졸라(엄청. 아 또 쓰고
말았군요. 졸라…) 투덜됩니다. 알면서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잠시간 녀석과
앉아 대화를 했습니다. 불쌍한 놈. 아직 제대할 날이 일년도 더 남은 엄청 불쌍한
놈. 녀석이 편지나 주고받자고 합니다. 애인처럼 보내주기로… 자기는 여자처럼
글씨를 잘 쓴다고 합니다. 녀석이 글씨를 예쁘게 쓰는건 내가 알지요. 하하 나도
글씨는 좀 예쁘게 씁니다. 군발이들끼리 편지주고 받기가 그렇지만 내무반에서 내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도대체 여자한테 편지가 오지 않습니다. 녀석도
그렇다는군요. 그래 작전상 후퇴다. 예? 그말은 여기서 쓰는 말이 아니라구요?
군발이들이 다 그렇지요. 그래 상부상조다. 앗 그녀입니다. 그녀가 자판기 앞으로
생각없이 왔습니다. 아직 저를 못봤습니다. 보면 큰일나지요. 내가 그녀의
애인이라고 사칭한걸 신일병이라는 놈이 그녀에게 다 말했다고 했습니다. 녀석뒤에
모습을 숨겼습니다. 우쒸. 참 친절하다 너. 대뜸 녀석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저기요. 그 자판기 맹물밖에 안나와요.
예?
그녀가 날 봤습니다.
처음에는 설마 날 알아보겠냐고 생각을 했습니다. 신일병이 말한 놈이 누군지 알게
뭡니까? 그런데 그녀는 날 안다는 듯 저놈이 고놈이구나. 하는듯 웃으며 나를 계속
쳐다봅니다. 병장까지 달고 체면이 말이 아니지만 달아나야 겠군요.
빨리 따라 나와 임마. 친구녀석한테 그소리만 남겨두고 그녀를 휭 지나쳐 도서관을
빠져 나왔습니다.
민이: 도서관에 나왔습니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말입니다. 휴가나와서 도서관
나올 확율은 적지만 그래도 도서관에서 군복입은 사람들을 간혹 봤습니다. 예전에
내가 앉던 자리가 비었군요. 그가 앉던 자리도 비어 있습니다. 그자리가 매일 그가
앉아 공부하는것처럼 그리움을 주네요. 공부를 할려고 온 것이 아니니 공부가 잘
될리 없습니다. 졸음이 옵니다. 어머 또 자버리고 말았군요. 잠을 깨야겠습니다.
커피나 한잔 하고 올렵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을려고 하는데 누가 맹물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훗. 돌아봤습니다. 낯익은 얼굴… 그리고
그 사람옆에는 그보다 더 낯익고 그리운 얼굴… 그가 있었습니다. 그는 내
기대처럼 도서관에 나와 있었읍니다. 군복차림도 아닌 예전에 많이 보았던 옷차림.
그가 내눈망울 머쩍은 듯 피해버립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일어서 나를 횡하니
지나쳐 달아나버렸습니다. ‘바보.’ 그의 친구도 곧 뒤따라 나갔습니다. 그 둘이
있었던 자리에는 맹물이 담긴 종이컵 두개가 그둘을 대신해 놓여 있습니다. 훗.
그의 친구가 그에게 예전에 내가 당했던 맹물커피의 복수를 해주었나 봅니다.
철이: 야이. 개라슥아.
왜그래 임마. 아까 그 여학생한테 죄지은거라도 있냐? 아니면 네가 짝사랑이라도
하는 여자냐? 그녀를 보더니 왜 갑자기 달아나는데?
그래. 둘다다.
정말? 그래? 너 눈 높다. 주제를 알아라 임마.
참내. 예전엔 별로 안이쁘다고 그랬잖아. 하기야 군발이라 안예뻐보이는 여자가
어디겠나.
내가 그랬냐? 그렇게 말하니 눈에 익다. 언젠가 나하고 말도 한 것 같은데…
민이: 그는 부끄러움이 많은 걸까요? 아니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걸까요? 그건
아닐꺼에요. 그가 보냈던 편지들은 점점 애틋한 느낌을 주며 그의 순수한 맘을
느끼게 해주고 있습니다. 처음 받았을때보다 더 말이죠.
그가 제대를 하고 나면 달라지겠지요? 호호 내년에 그가 복학을 하면 나와 같은
3학년이겠네요. 나도 내년에 복학을 할 거니까 말이에요.
철이: 또 부대복귀할 날이 이틀밖에 남지를 않았습니다. 도서관이나 가볼까요?
자전거친구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당구나 치자고 합니다. 그래.
당구를 치다가 녀석이 뭔가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시간 겐세이를 엄청 하는군요.
아 맞다. 오늘 도서관 휴게실에서 그녀를 봤다.
누구? 빨리 쳐 임마.
그 네가 짝사랑한다는 여학생말이야.
그녀가 도서관에 있대?
응. 어떤 남자하고 있던데… 쭈글하고 이상하게 생긴 남잔데 선밴가봐. 뭘
상담하더라.
뭘?
얼핏 들어서 자세한건 모르고 그녀가 남자친군가?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고
하던데… 뭐 그도 자길 좋아하는데 반응이 없다면서 자기가 어떻게 할까?
물어보던데. 안됐다 너. 불쌍한 놈.
뭐. 좋아하는 남자가 있을수 도 있지. 난 그냥 짝사랑이야 임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분이 이상합니다. 꼭 내 맘을 어떤놈한테 뺏긴것 같습니다.
다 이겨가던 당구도 패하고 말았습니다. 복귀하면 잊혀져 가겠지요. 하하. 흑흑…
민이: 오늘도 도서관을 왔지만 그는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부대복귀를
했나봅니다. 우리과 남자선배와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셨습니다. 참 웃기게 생긴
선배입니다. 하지만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있는 선뱁니다. 말도 재밌게 하고 다정한
면이 많거든요. 같이 앉아서 얘기를 좀 했지요. 그냥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남자친구얘기가 나오게 되었고 그가 생각이나 몇마디 물어보았지요. 나도 그를
좋아하고 그도 나를 좋아하는걸 아는데 우리는 아무사이도 아니고 심지어 몇마디
대화도 못나눈 사이라고 했습니다. 선배가 끌끌 웃더니 서로 짝사랑하는 사이구만.
그러며 누군가 손만 뻗으면 되는 간단한 일인데 그게 참으로 어려운게 아쉽다고
합니다. 맞아요. 잘아시는군요. 그래서 또 물어보았습니다. 그가 편지를 보내 먼저
손을 뻗었는데 사소한 오해로 그걸 내가 거부했다고 했지요.
간단하네. 너도 편지보내면 되겠네 뭐.
호호 그렇네요. 위문편지는 취솝니다. 어떤 내용으로 보내지?
얘기에 정신이 팔려 몰랐는데 휴게실에 그의 친구가 있었네요. 그가 혼자 있는걸로
봐서 그는 부대로 돌아갔나봅니다. 그가 나왔다고 한날로부터 열흘이 훨씬
지났습니다.
철이: 부대 복귀를 했습니다. 찝찝합니다. 복귀한거 자체도 찝찝하고 그녀 때문에
또 찝찝합니다. 신일병이 반갑게 날 맞이했읍니다. 고참들한테 인사하고 보자 잉.
내가 휴가간 사이 그녀가 면회를 왔다는군요. 또 내 얘기를 했답니다. 물론 좋은
말했을 리 없겠지요.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녀석의 머리를 겨드랑이에 끼고 알밤을 깠습니다.
왜 때려요?
어라. 나보다 일년이나 짬밥이 없는놈이 개깁니다. 군대 많이 좋아졌다.
좋은말 많이 해주었는데요. 누나도 성병~장님 얘기 많이 했단 말입니다. 좋게요.
끝까지 놀리네요. 그래 내가 아들뻘인 너하고 입씨름해서 뭐하겠냐? 가서
꽃편지지나 사와라.
민이: 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애틋하게 아련하게 그리고 그가 그랬던 것처럼
내마음속 그의 모습을 그려서 말입니다. 그가 나에게 보냈을때처럼 저도
무기명으로 보냈습니다. 그래도 그가 내가 보낸걸 알것이라고 믿습니다.
모를까요? 괜찮읍니다. 나도 그처럼 계속 보내면 되니깐요.
철이: 끌끌. 빨리도 보냈다. 이렇게 보낸다고 내가 넌 줄 모르겠냐? 꽤 여자처럼
썼다. 글씨도 예쁘고 뭐 하나 나무랄게 없구만. 휴가때 자전거친구가 제의했던걸
실천에 옮겼습니다. 고참들의 눈초리가 놀라는 빛입니다. 그 괜찮네요.
무기명입니다만 그의 군부대 주소는 이미 알지요. 우표에 찍힌 도장은 희미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서울같기도 한데…아니겠지요. 편지를 전에 받았던 편지와 같이
놓았습니다. 하하 녀석이 전에 나한테 보낸 편지가 눈에 띠네요. 글자가
비슷합니다. 녀석이 맞군요. 신일병한테 뺏은 그녀의 편지의 글자와도 비슷합니다.
더 비슷한거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네 글씨 하나 만큼은 맘에 든다.
답장은 몰래 써야 겠지요? 저도 여자처럼 보내야합니다. 무기명으로 보낼까요?
한때 무기명으로 그녀한테 편지를 많이 보냈었는데 기분이 새롭겠네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