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어] 어느 오래 전 이야기 편지

같은 동호회 분인데 항상 이 분 글에 큰 감동 받곤 하져…

아직 허락도 받지 않고 냉큼 퍼 왔습니다.

심호흠 크~게 한 번 하시고

차분한 맘으로 천천히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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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학 1학년은 아무 생각없이 지냈습니다.

  재수생과 삼수생까지 득실거리던 우리 과는 마치 예비군 훈련장 같았거든요.

  저 옆의  디자인 계열 애들은 솜털이 뽀송뽀송할 뿐만 아니라

  부티도 출출 나서  쳐다보고만 있어도 흐믓함과 동시에

  슬픈 먼나라 이웃나라이기도 했습니다.  

  미술해부학은 201 계단 강의실에서 했었지요.

  그 수업에서 당신을 처음 보았습니다.

  자세히 보았습니다.

  복학생이었나 봅니다.

  썩은 된장의 무리들 사이의  한 조각의 상큼한 레몬이라고나 할까요.
  
  당신이 나의 대각선 앞쪽에 앉았는데, 고개를 저 쪽으로 돌리는 순간

  불거져 나온 흉쇄유양근이 눈에 띄었습니다.  

  석고상 ‘쥴리앙’의 귀 뒤 유양돌기에서부터 쇄골까지 내려오는

  그 유명한 근육에 눈이 익은 터라,

  당신의 그것은 무척 왜소했으나  깡마른 체격에 비하면

  역시 남자는 남자구나.. 하는 해부학적 견해도 갖게 되었지요.  

  또한 당신은 남들보다 두정골이 발달했고, 전두골과 후두골 사이가

  아주 넓어서  전체적으로 지극히 서구적인 두경부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아.. 얼마나 매력적인 두개골이었던지요.

  저같은 두개골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볼 때,

  그건 한 눈에 마음을 빼앗기기에 충분한 두상입니다.    

  게다가 당신은 황인종이 아니라 백인종이었을 겁니다.

  당신이 앉은 자리에는 언제나 불을 하나 켜놓은 것 같더군요.

  흠.  외모만 보고 좋아하기 시작해서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외모’라고 해도 뭐 표피만 보이는 건 아니잖아요.

  표정이나 말하는 거, 몸짓, 손짓, 이런 걸 보면 대강 읽히니까요.

  아니, 저는 많이 읽을 수 있어요.  

  친구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당신은 보스기질이 있습니다.

  아니면 모습에 비해 나이가 많던가요.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주로 듣지만, 몇 마디 말에도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경우가 많군요.  소근과 권골근이 땡겨질 땐 저는 그만

  그 자리에서 현기증을 느끼고 말았습니다.  오옷~  

  그 얇은 안면표피의 주름은 내가 본 가장 매력적인 미소의 결과였어요.
  
  눈 돌아가는 게 상당히 빠르지만 눈초리가 비열하진 않구요.

  손이 특이해요.  손가락 하나하나가 마치 발레하는 여자의 몸매 같아요.

  주먹질엔 소질이 없겠네요.

  또한 그리 풍족하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군요.

  앞니 하나가 많이 비뚤었는데 교정을 하지 못한 걸 보면요.

  그리고 누가 보나 결코 털털한 성격은 못되겠군요.  

2..

  후아…..

  저는 이게 또 몇번째의 짝사랑인지 꼽아볼 여유도 없었습니다.

  거의 정기적으로 짝사랑만 해본 사람은 아마 알겁니다.

  한 편으로는 설레이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또 시작이군.. 하고.

  그러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이 또 이런 짝자기 사랑에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내 힘으로 구해낼 수 없다는 무력감.

  아무튼 사랑이라는 걸 시작하면 저는 아주 바빠지지요.

  당신에 대한 생각을 대부분의 일상에 병행하게 됩니다.

  옷을 입을 때나 물건을 살 때 무조건 당신의 눈으로 대신 고르게 되지요.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 나오면  당신이 가본 곳일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내 엄마 옆에 있을 땐  당신의 어머니를 상상합니다.

  무얼 먹든 어딜 가든 당신과 연관이 됩니다.  

  더 알고 싶었습니다.

  남들 몰래 당신에 대한 많은 걸 알고  또 그리워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긴장을 해서인지 엄청난 에너지도 생기는 거 같아요.

  언젠가 혹시라도 제가 당신의 눈에 뜨일 것에 대비하는 일.

  멋을 부려야 할지  수수해야 할지 먼저 정해 두어야 했구요.  

  어떤 관심사에 맞춰야 할지도 알아야 했습니다.

  유화 시간이 가장 기다려집니다.

  내가 당신의 그림을 봐야하고  당신이 볼 내 그림을 그리는 시간.

  그건 서로 쳐다보고 대화를 나누는 일보다

  더욱 친밀한 관계의 소통일 수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 정물들 중에서  층층이 깔려진 켄버스 천만 그렸습니다.

  아니, 정물을 한 두개 넣었던 것 같기도 하군요.

  그 그림은  아주 세련되고, 정확하지만, 인상파적으로, 아니면

  클림트나 에곤 쉴레의 느낌, 그리고 회갈색이나 그레이 베이지 색감에    
  
  선명한 초록색과 짙은 빨강의 하일라이트를 조금 곁들였습니다.

  사람들이 내 그림 뒤에서 수근거렸습니다.

  나쁜 말을 하는 거 같지는 않군요.  

  그 사람들 가운데 당신도 오랫동안 서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습니다.
  

  나는 당신한테 관심이 있다고 친구들에게 슬쩍 내비쳤습니다.

  내가 너무 들떠보이지 않게 조심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지요.

  생각 같아서는 아무나 붙잡고 말하고 또 말하고 당신에 대해 설명하고

  끊임없이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건  크게 키울수록 좋은 게 아니었던가요.

3..

  첫 스케치 여행을 갔을 때..

  내 눈은 역시 당신만 계속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그건 아주 재미있는 거예요.  

  거리를 두고  혼자 좋아하고 지켜보는 것.

  대사가 없는 다큐멘터리 영화 같기도 합니다.

  제가 마음 속으로 멋지게 해설을 붙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가끔 눈이 마주치는 거였어요..  그런데 그게 우연한 일이 아닌 거

  같다는 말입니다.. 가슴 속에서 번개와 천둥이 한꺼번에 내리 치더군요.

  당신의 눈도 나를 쫓고 있었다면..

  아..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마음이 무척 어지러워지면서 ..  아주 떨리기도 하면서…

  거리를 두는 게 재미있다는 생각은  일순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뒷풀이는 신촌 어귀의 순두부집이었어요.

  내 친구들 패거리 옆에 굳이 자리를 잡는 당신네 패거리를 보고

  이건 막판 조짐이다.. 생각하고  떨리지만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준비물은 물론 소주였구요.

  당신네 패거리 중 어떤 애가 순두부를 주제로

  하드고어 스토리를 늘어 놓습니다.

    " 야야, 저번에 길에서 교통사고 난 걸 봤는데 말이야,  

      가까이 가서 봤지.  죽었나 살았나.  

      근데 인간이 머리가 깨진 거야 글쎄.  브억~

      그래서 따끈따끈한 순두부가 일인분 나왔드라구. 허옇드라.  

      그거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그려버리면 어떨까..

      그나 저나 얼른 뚝배기 들고 가서 뜨거울 때 딱 받아놔야 되는

      거였는데..  쯧쯧.    자 자.. 순두부 나왔어요.

      뭐하냐? 얼른 먹자.  니네두 먹어라? "

  웃을 기력도 없고  야유를 퍼부울 기운은 더욱 없었습니다.

  분위기가 어수선했어요.  다들 피곤했구요.  

  그 때..

  그 피곤한 순두부스러운 분위기를 꿰뚫으며 화살같이 날아오던  

  당신의 한 마디.

  …..  너, 나하고 사겨보자.

  …..  저.. 저요?

  에그.. 머니나.  ‘너’가 누구냐..  어머.. 나구나.  나 맞네.  

  이.. 이런 경우가..   저는 그냥 달달달 떨고 있었어요.

  시끄러운 밥집 소리가 멀어지면서

  쟁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 같은 게 들려 왔습니다.

  주변에 있던 내 친구들과 당신 친구들이 모조리 눈이 똥그래졌지요.

  아마도 그런 매우 사적일 것 같은 고백을

  너무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언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 널 지켜보고 있었어. 니가 마음에 든다.

  그 샌님같은 얼굴에서 어떻게 저런 최민수식 멘트가..!

  저렇게 말했던 거, 당신은 기억하고나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또 확실히 기억하는거..

  저는 그 날  날개 펴고  훨~훨~ 날아서 집에 들어 왔습니다.

  

4..

  그 후,  우리 둘이 주인공이고  다른 애들은 전부 엑스트라가 되어버린

  드라마 같은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내가 그리도 아름답다고 주장하던 째즈나 알엔비는 쏙 집어 넣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클래식만 쫓아다니느라구요.

  당신은 아주 추상적인 이야기를 잘 늘어 놓았어요.

  그게 당신의 매력이었는지도 모르겠군요.

    " 달걀을 좋아해?  달걀은 깨는 것보다 보듬는 게 더 어렵지..  

      가만히 달걀을 잡아봐.. 얼마나 불안한지..

      너무 꽉도 아니고 너무 살짝도 아니고.. 어느 정도가 있는 거거든..

      달걀을 잡듯이 그렇게 생활을 잡아봐.. 생각도 꼭 그 정도로 하고..

      지금 가장 고민스러운 게 그 달걀과 같은 거 아니야? "

  저는 아마 멍청한 눈으로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겠지요.

  당신은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어요.

  
    " 생각해 보라구.. 나무는 정말 절묘하게 좌우 균형이 잘 잡혀

      있지 않아? 형상이 아름다우면 뿌리를 없애도 쓰러지지 않는 법이야.

      삶을 한 그루 나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나뭇가지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간 조화로운 가능성의 나무..

      나는 한 동안 길을 잃고 있었지.. 빠져나올 수 없는 터널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언젠가 니 뒷모습을 보면서 걷다가.. 갑자기 알게 되었어.

      난 다시 내 길을 찾은 거 같아. "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몰라도

  나는 역시 다 알아들은 척하고 있었을 테지요.

  아니, 이건 편지였을 겁니다.

  웃음이 나는군요.

  이런 황당한 낭만주의는 사람을 어린애처럼 만들어버리곤 합니다.

  짝사랑은 좋지 않은 습관이예요.

  대상은 있지만 혼자의 일이기 때문에.. 막상 같이 나누는 사랑을 할 때에

  어색해지고 맙니다.  ‘ 서로 나누는 사랑’ 이라는 게 아주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건 그 후로도 한참 더 지나서였습니다.  

  

5..

  당신 집에까지 찾아가 봤던 거 모르시지요?

  그 날 당신은 학교에서 저와는 마주치지도 않은 채 밖으로 걸어가고 있더군요.

  저는 그냥 따라 갔습니다.  부르려고 했지요.   만나서 얘기나 할까 하고.

  걸음이 꽤 빠르더군요.  집에 가고 있는지도 몰랐어요.

  그 오래된 아파트.. 당신을 따라가다가 놓치고 말았지만.. 저는 내킨 김에

  알고 있던 주소를 찾아서 끝까지 가보기로 했었습니다.  

  당신은 어디로 갔나요.

  산꼭대기로 열심히 올라간 후에.. 다시 밑으로 들어가서 계단을 한참 걸어

  내려가고.. 시커멓고 눅눅한 지하..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홋수를 알 수

  없는 현관문들..  흥건히 밟히는 물기..  널린 쓰레기와 뜯어낸 창틀..  

  습기찬 박스들..

  누가 볼까봐 얼른 나와버렸습니다.  

  옷에 묻은 곰팡내와 눅눅함을 털어내면서.

  늘 그렇게 있을 것 같은 햇볕이  전혀 비춰지지도 않는 곳.

  내게 비치던 햇볕이 죄스럽습니다.

  그 곳이 한 동안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6..

  당신이 아팠다는 얘기는 한참 후에나 듣게 되었습니다.

  그 여름 땡볕.  

  티셔츠를 치키고 갈비뼈에 있는 수술자국을

  슬쩍 보여준 적이 있었잖아요.

   " 나두 그런 수술자국이 하나만 있음 좋겠다.. " 라고 말했죠.  

  그 안에 쇠가 들어있다고 해서 만져봤지만

  별로 쇠같은 느낌은 없었어요.

  그래도 부러웠어요.

  10년 후, 우연히 저도 폐병에 걸렸습니다.

  저는 당신의 병이 제 가슴 속에서 10년의 잠복기를 지냈다고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기침을 하면서 당신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10년 전이라면 잘라냈어야 할  다 찌그러진 허파 덩어리를 보면서

  나도 이제 가슴에 쇠를 박아 넣어야 한다는 생각에 잠시 들떴습니다.

  하지만 저는 수술을 하진 않았어요.  

  폐는 다시 소생을 했고 공기가 가늘게 들락거리는 새끼 고양이 소리를

  확인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7..

  우리가 ‘고도를 기다리며’를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본 거 맞지요?

  그걸 보면서 우리는 똑같이 ‘럭키’라는 인물을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감동했지요.

  ‘럭키’는 ‘포조’라는 미욱하게 생긴 사람의 종으로서

  개처럼 목에 끈을 묶어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게 합니다.

  그 극단의 럭키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긴 머리에 깡마른 젊은이였지요.  

  요즘도 공연되는 ‘고도’에는 꾸부정한 할아버지 럭키가 나옵니다.

  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럭키는 키가 큰 젊은이여야 합니다.

  ‘포조’가  "생각해! 이 망할 놈아!"라고 명령하면  우리가 아는 럭키는

  우렁찬 목소리로 그 현학적인 말들을 늘어놓습니다.  

  힘차게 울리지만.. 그렇지만 슬픈 목소리입니다.

  럭키의 대사를 잠깐 써 볼게요.

     또 한 편으로 보면 그것은..
     공간의 시간밖에 존재하고 있어 거룩한 무감각과 거룩한 실어증 위
     높은곳에서 일부의 예의를 제외하고는 우리를 사랑하는데 그 까닭은
     모르지만 곧 알게 될터이고 거룩한 미랑다의 본을 따서 고뇌속에 불
     속에 있는 자들과 함께 그 고통의 겪는데 그 까닭은 모르지만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기로 하고, 그 불과 불길은 조금만 더 계속되어 의심할
     여지없이 결국에는 대들보에 불을 지르게 되겠는데 다시 말하면 지옥을
     하늘까지 들어 올리게 되겠는데 그 하늘은 오늘까지도 때로는 파랗고
     고요하고 너무나 고요해서 비록 단속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반 가운데
     속단은 금물이고 보니, 또 한편으로는 미완성인데도 불구하고
     ( 중략 )
     스타인버그와 피터만이 진행중에 있는 실험에 비추어 볼때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들어나니 더더욱 중대한 문제지만, 스타인버그와 피터만이 포기한
     실험에 비추어 볼때 들에서 산에서 바닷가에서 물가에서 불가에서 공기는
     똑같고 땅도 같고 다시 말해서 공기와 땅은 혹독한 추위 때문에
     공기와 땅은  오호라 그 제7기원의 혹독한 추위 때문에 돌들을 위해서
     이루어졌고 그것은  다시 말하거니와 왜 그런지 모르지만 테니스에도
     불구하고 사실이 그러하며   다시 말하거니와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아무도 의심할 수 없지만  돌을 위해서   다시 말하지만 그러나 속단은
     금물이니 다시 말하지만 머리가 동시에 병행해서  왜 그런지 모르지만
     테니스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수염 불길 눈물 그토록 푸르고
     고요한 돌들이 오호라 머리, 머리 노르망디에서는  어리가 테니스와
     더욱 중대한 문제지만 포기된 미완성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요컨대 돌은
     다시 말하거니와 오호라 오호라 포기된 미완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머리
     노르망디에서는 머리가 테니스에 불구하고 머리가 오호라 돌들이 코나르
     코나르—– 테니스! 돌들이!—– 그토록 고요한 —코나르!—미완성!–

  이렇게 처절하게 생각을 소리치는 망할 놈 럭키는,  그 럭키라는

  인물이 매력적인 이유는 아마도, 다시 말하거니와, 한 편으로 생각하면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기로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겐 럭키가 그 때의 당신의 처지를 보여준 게 아닐까 하고,  나에겐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미래 나를 미리 보았기 때문이 아닐른지….

  그래요.

  우리는 공감했지만 엇갈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혼자서만 만들어냈던 당신의 허상을 없애고

  현실의 선명한 당신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언제나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고  

  그게 고도든 뭐든

  뭔가를 찾아서 아예 떠나 버릴 사람 같았습니다.

8..

  DO YOU BE.

  당신이 제 곁에 있었던 사람인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야속하군요.  

  8년 전  어떤 전시장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당신은 정말로 저를 못 알아보고 한참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그렇듯 이제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합니다.

  지금 제 앞에는  

  오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던

  당신의 그 개인전 팜플릿이 있습니다.

  작품이 좋네요.  

  고생도 많이 하셨다구요..?

  어떤 사람이 말하길

  옛연인을 다시 만나서 옛감정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그래서 옛날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까..  

  하길래  실컷 비웃어 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게 싫어요.  

  옛 감정이 되살아 나다니요.  

  저도 변했어요.  그 감정은 그 때의 것입니다.

  단지 오늘은

  지금을 살고 있는 제가  그 때의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는 것.

  스무살 그 때,  그 오래 전의 이야기를 혼잣말 하듯이 쓰고 싶었던 것.

  그것 뿐입니다.    

  부디 행복하세요.
    
    

                                      
                                      soon     라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