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동기였던 곽세연 씨가 퇴직하면서 남긴 글입니다.
여러모로 많이 느끼게 해주는 글이라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세연씨의 밝은 앞날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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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 ‘화양연화’라는 말은 ‘한 여자의 일생에서 아름다운 시절’을 의미합니다. 왕가위의 <동사서독>에서도 같은 의미의 대사가 잠깐 나옵니다. 영화 말미, 병들어 죽어가는 중년의 장만옥이 젊은 시절 강호 무림에 나서기 위해 자신을 떠났던 장국영을 회상하면서. “내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그 사람은 곁에 없었다”라고 말하며 허무해 하죠.
제가 아는 사람 중에 2년 전 사귀던 여자에게 버림을 받은 남자가 한 명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일년 이상 떠난 여인을 못 잊고 괴로워 하다가, 몇 달 전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결심하니 떠난 여인이 더 보고 싶어지더랍니다. 꼭 한번만, 잠깐이라도 보고싶다고…. 쑥쓰러워서 사랑한단 말을 하지 못했던 게 가슴에 맺힌다고….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뭔가 달랐을 거라고….
며칠 전 이 남자는 제게 전화를 걸어 자기를 떠난 그 여인을 봤다고 했습니다. 운전 중 신호대기로 서 있을 때 우연히 고개를 돌려 옆 차를 봤는데, 바로 그 여인이 앉아 있더랍니다. 남자는 “너무 놀라 온몸이 얼음처럼 굳어지더라”는 말로 당시의 기분을 설명하면서 “봤더니만 나를 만날 때보다 많이 못생겨졌다”고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이 일을 계기로 과거에 대한 애틋한 아쉬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예전보다 덜 예쁘게 변한 그 여자를 보고 ‘저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는 내가 곁에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랍니다. 그걸로 모든 걸 만족할 수 있었다고…. 이제 편한 마음으로 새로 만난 약혼녀에게 갈 수 있겠다고…. 그 사람도 좋은 사람을 만나 예전보다 더 아름다워지길 바란다고… 사랑했던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엔 내가 곁에 있었노라…. 그 말을 몇 십번이나 되새겨봤습니다.
“과거의 여인을 마음속에서 지운 건 좋은데, 사랑한다고 말 못했던 것도 후회가 없냐”고 제가 물었죠.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전엔 사랑이란 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말로 해야만 영원한 줄 알았어.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하든 안 하든 차이가 없어. 사랑이 말 한마디로 영원해질 수 있나.”
첫 직장이었던 만큼, 그리고 근무한 시간이 짧았던 만큼 더더욱 아쉬움도 많이 남습니다. 제 인생에서 더 나은 화양연화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공부할 작정입니다. 어제 같이 과음해 주신 분들, 오늘 점심 식사에 기꺼이 나와주셨던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저의 아름다운 시절엔 곁에 여러분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