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나] 날 흔드는 연애의 추억과 목적

통화를 끝낸 J가 비탄에 잠긴다.
  
종적이 묘연한 애인을 찾기 위해
  
흥신소에 의뢰 비용을 물었더니 200만원을 부르더란다.
  
애인은 J에게 J와 결혼을 약속했던

얌전한 남자친구를 버리도록 종용해놓곤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 버렸다.

하지만 J는 아직까지 그를 기다리고 있다.

몇 년간 쉴 새 없이 새로운 사람들을 정력적으로 만나오고 있는 J이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유행 감기처럼 그를 찾는다는 것을 알기에

나도 이제는 나서지 않는다.

그저 적금만 깨지 않도록 달랠 뿐이다.

뭐, 나 역시 이 갈리게 저주하는 어떤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삼삼히 생각날 때가 있긴 하니 말이다.

결혼이라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

‘실패한’ 연애들을 되돌아볼 때,

상대가 ‘나쁜 사람’이었는지의 여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더라는 사실이 놀랍다.

수치감에 눈물 흘리고, 배신감에 치를 떨고,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던 연애였더라도,

매혹당했던 순간의 찬란한 감정만 살아 있다면

삶의 위안이 되어주는 어엿한 추억으로 승격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라고 자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또래의 친구들에게서는 흔하게 발견되고 있는 이상한 관용이다.

‘협잡꾼’이라던 남자와 오래 연애했던 한 후배는

그가 잠자리에서 베개를 부지런히 고쳐주며

머리를 편안하게 받쳐주던 기억 때문에

그를 쉽게 잊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반년을 사귀고 보니 ‘변태’였다며

길길이 날뛰던 한 친구 역시

그가 운전하며 낮게 노래하던 순간만큼은 예쁘게 회상된다면서 머쓱해한다.

서른 살이 넘다 보니

이렇게 대체될 수 없는 어떤 감정이나 감동의 가치가 정상적이며 안전한 것의

머리 위로 상승해버린다.

연애 감정은 이성과 논리의 사각지대에 위치하는 것이 맞나보다.

이미지 콤플렉스에 휘둘리는 바보들이라고 흉봐도 좋다.

그런데 지리멸렬하고 뻔한 인생이

우리에게 인색하게 선물하는 낭만을 탐한다는 것이 한심하기만 할까?

착한 남자들은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여자들이 순정만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래!

미남에 대한 철없는 팬터지를 버리지 못하는 거지.

그렇지만 현실에서 결국 여자가 택하는 것은

착한 남자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해. 비로소 어른이 되는 거라고.”

결혼이 방황과 모험 아니길 바랄 뿐

물론 결혼은 연애 감정으로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다.

아찔한 설렘을 선사했던 남자더라도

그의 심성이나 비전에 대해 무엇보다 꼼꼼하게 따져봐야 할 것이다.

심지어 정착하지 못하고 끝없이 미끄러지려는 매력남은

여자들에게 가장 인기 없는 신랑감이다.

그럼에도 착한 남자와의 결혼을 감정의 최종 선택지라고 보지는 말아야 한다.

마음속의 팬터지가 끝내 손상되지 않은 채

영원을 약속해온다면 어쩔 것인가.

베개의 감촉이, 차 안의 허밍이

지루한 일상 가운데서 갑작스레 사무쳐올 수도 있다.

어긋난 연애가 어느 날 도적떼처럼 나를 흔들어댈

인생의 변수가 되는 것을 방치한다면 나쁜 여자인 걸까.

답이야 무엇이건 남자들의 속마음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불안한 것, 그리고 불온한 것에 대한

본능적인 동경이 진실한 ‘연애의 목적’이라는 가설은

결혼이나 가족 이데올로기와 맞서 신통하게 경쟁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연애가 불가항력적인 감정 상태라고 동조해주던 누군가도

막판에 결혼이야말로 인생의 진정한 어드벤처라고 초를 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럴듯한 지적이기는 하나 과연 결혼이 예측 가능한,

지극히 안정적인 것이 아니라면

굳이 뛰어들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회의가 든다.

20대를 힘겹게 통과한 싱글은

결혼이 지나온 대로의 방황이나 모험이 더 이상 아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