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속에 간직한 야한 속옷
"오늘 나랑 술 한잔 하자."
"어, 나 지금 못나가는데.."
"잔말말고 제과점 앞 호프집으로 나와. 나 지금 미칠 것 같아."
뭐라고 말을 하려는 우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오늘은 소개팅으로 만났던 정호씨와의 6개월간의 만남을
정리한 날. 처음과는 달리 만날수록 나에게 무관심해지는 정호씨에게
내가 먼저 이별을 고해 버렸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내 이별선언에
조금은 아파하고 한 번쯤 애원하는 그의 모습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무덤덤 할 뿐이었다. 나 역시 대수롭지않게 그와 이야기
를 끝내고 일어섰지만 집에 오는 내내 영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이
건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만 한 것뿐이지 사실은 내가 채인거나
다름없는 거니까.. 그래서 무너진 내 자존심을 채우기 위해 나는 술
을 마시고 있고, 마시다 보니 문득 혼자인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한
것 같아 우진이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이우진, 내 오래된 남자친구.. 어떤 이들은 이 남자친구라는 호칭을
애인과 같은 뜻으로도 쓰기도 하다만 우진이는 나에게 말그대로 그냥
남자친구일 뿐이다. 우진이는 유치원 때부터 지금까지 15년넘게 나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고 초등학교 동창생이다. 나는 형제라고는 일곱
살이나 위인 언니뿐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우진이와 무척 친하게 지냈
다. 그러기에 우진이는 지금 스물다섯살이나된 내가 세수하고 아무것
도 안바른 얼굴을 보여주어도, 무릎나온 츄리닝에 슬리퍼 끌고 돌아
다니는 모습을 보여도, 또 지금처럼 실연당하고 혼자술마시는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어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그냥 친구일 뿐이다.
병맥주를 네 병째 비우고 있는데 우진이가 헥헥거리며 호프집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무슨일이야.. 과외하다가 집안에 일이 생겼다고 하고 달려왔어."
우진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난 혼자 술마실 용기도 없거든. 그래서 너 오라고 했는데, 나 오
늘 실연당한날이니까 우리 아무말도 하지말고 그냥 술만 마시자."
나는 단숨에 반병이 넘게 남은 맥주를 들이켜버렸다. 그리고 그날 우
진이는 정말로 아무말도 없이 그렇게 내 술시중(?)을 들었고,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술만 마시자던 나는 결국 먼저 취해서 앞뒤가 맞지않
는 술주정을 부리다 우진이에게 엎혀서 간신히 집에 올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전날 마신 술로 머리가 깨질 것 처럼 아파서 누워 있
는데 우진이에게 전화가 왔다.
"머리 아프지? 약 사왔어. 잠깐 나와라."
전화를받고 나가보니 우진이는 한손에는 약을, 다른 한손에는 꽃한송
이를 들고 서 있었다.
"나 괜찮으니까, 위로 같은 거 하지 않아도 돼."
나는 우진이가 건네준 꽃을 받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수연아.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때인지 모르겠지만.."
"뭐?"
"사랑은 멀리서 찾는게 아니라 가까이서 찾는거래."
"근데?"
"또 사랑은 한순간에 반해 버리는 것 만이 아니라 끝없는 관심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는거래."
"그래서?"
"그래서 말인데……."
"얼른 말해."
"나……. 나, 너 사랑하는 것 같아."
갑작스런 우진이의 말에 나는 정말 깜짝놀랐다. 사랑? 사랑이라고라?
한동안 멍한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망설이던 나는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친구야. 괜한 일시적인 감정으로 친구의 우정 깨려고 하
지마."
"난, 난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야. 예전부터그랬어. 널사랑했다고!"
우진이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웃기지마. 넌지금 실연당한 나에 대한 동정심을 사랑으로 포장하
고 있는 거야. 이런 이야긴 더 이상 하지 말자. 난 들어갈래."
그대로 돌아서서 나는 들어와 버렸지만, 저녁 내내 웬지 기분이 이
상했다.
하지만 바쁜 신입사원생활은 나에게서 실연의 아픔도, 우진이에 대한
생각도 모두 떨쳐버리게끔 도와주었다. 그도 그럴것이 매일같이 새
벽에 회사에 출근하면 밤늦게야 집에 돌아오니 이런저런 다른 생각할
틈이 전혀 없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한동안 회사일에 빠져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그날도 늦
게까지 회사에 남아 일을 하고 콩나물 시루같은 전철을 타고 집으로
걸어오는데 골목 어귀에 낯익은 뒷모습의 남자가 서있었다. 우진이였
다. 나를 기다린건가? 이시간까지?
그동안의 서먹했던 일도 있는데 어떡해야 하는건지 망설이고 있는데,
갑자기 어느 집의 대문이 열리면서 한 여자가 뛰어 나오는 것이었다.
"오빠~!"
나보다 서너살은 어려 보이는 그 여자 아이는 우진이와 아주 친한 듯
나오자마자 우진이에게 팔짱을 끼며 활짝 웃어 보였다.
이시간에 이렇게 만나는 것을 보니, 우진이 여자 친구인가 보네..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그냥 태연히 걸어가려고 하는데, 웬지 묘한 기
분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등을 돌리는데, 우진이가 나를 불렀다.
"수연아!"
"으…. 응. 안녕."
"늦게 퇴근하는구나."
"으.. 응."
내가 말하고도 웬지 어색한 목소리였다.
"근데, 너희집은 저쪽인데 왜 돌아가?"
"아… 음.. 응, 마저! 제과점에서 빵 좀 사가려고.. 엄마가 사오
랬거든."
"빵집 지금 문닫았을걸?"
옆에서 여전히 팔짱을 끼고 있는 여자 아이는 까르르 웃어 보였다.
"그….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뭐. 갈게. 안녕."
"잘가라.."
뒤돌아서 돌아오는데 여자아이가 우진이에게 누구냐고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친구."
친구? 그런데 그 친구라는 말이 왜그렇게 섭섭하게 들려오던지.. 그
두 사람을 두고 돌아서는 내 모습이 왜그렇게도 초라하게 느껴지는
지.. 우진이는 왜 나를 그냥 친구라고 했을까? 여자친구라고 해도 됬
을텐데.. 우진이도… 여자친구는 애인과 같은 뜻의 말이라고 생각하
나부지? 그날 밤, 나는 웬지 모를 허전함에 조금도 잠을 이룰수 없었
다. 얼마전 정호씨와 헤어졌을때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마음이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다음날, 전날 잠을 못잔 탓에 하루종일 어지럽던 나는 점심시간이 되
어 조퇴를 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집에 와서 침대에 누워있는데 저녁
때 쯤 우진이에게서 호출이 왔다.
"부탁이 있는데,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 좀 내줄래? XX백화점 앞에
서 만나자."
웬 부탁? 그리고 웬 백화점 앞? 쇼핑이라면 여자 친구랑 할 것이지..
투덜대며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주말까지 나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
국은 우진이를 만나러 나가고야 말았다.
"부탁이 뭐야?"
퉁명스러운 나의 대답에 우진이는 뒷통수를 긁적이며 멋적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 사랑고백 할거거든. 그냥하려면 쑥스러우니까 선물사
려고.. 네가 골라줘."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지만 나는 웬지 서글퍼졌다. 그리고
는 반지나 목걸이를 산다는 우진이에게 그건 촌스러운 구세대들이나
하는 선물이라며 야한 속옷을 사주라며 괜히 심술을 부렸다.
"사이즈도 모르는데 어떻게 속옷을 사?"
"사랑고백할 상대라면서 사이즈도 아직 모른단 말야? 바보처럼?"
"음…. 대충 너정도 될 것 같아."
"나? 나는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흔치 않은 C컵이야."
나는 손을 허리에 얹고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우진이는 그런 내모습
을 보고 한참을 웃더니 점원에게 그 사이즈로 포장해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우진이는 차나 한잔 하고 가자며 싫다는 나
를 끌고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저번엔 미안했어…"
"뭐가?"
"네 기분은 생각지도 않고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해서.."
"니가 그렇지 뭐. 난 착하니까 다 이해해."
괜히 심술을 부리는 나를 쳐다보며 우진이는 여전히 멋적은 듯 웃어
보였다.
"그래서 말인데… 다시 해도 되겠니?"
"뭘?"
"니 허락 받고 할래."
"참내.. 뭔데? 무슨 쇼라도 보여줄라고 그래? 어디 한 번 해봐."
"먼저 이거 받아.."
우진이는 아까 나와 함께 산 속옷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의아해
하는 나를 보며 말했다.
"나 이우진은 김수연을….. 사랑해. 지금까지 우리 오랜 우정, 이
제는 사랑으로 포장시켜도 되지 않을까?"
갑작스런 우진이의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헤.. 잘안된다. 국문과 다니는 후배애 한테 교육도 받았는데.. 실
전으로 하려니까 잘안돼는걸?"
후배? 그럼 저번의 그 여자아이가…
"그치만, 수연아.. 너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이야. 백만번을 생각해
도 그래. 사랑해."
우진이의 말에 갑자기 나는 그동안 쭉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
다. 그래… 나도 우진이를 사랑했었나 봐… 그랬던 건가 봐…
여전히 울고 있는 나를 보며 우진이가 말했다.
"와! 완전 시나리오 그대로 인걸? 후배가 자기가 써준대로 이렇게
말하면 니가 울면서 나도 사랑한다고 말할거라고 했는데.."
어린애처럼 천진하게 웃는 우진이를 보며, 나는 더 펑펑 울고야 말았
다. 아무말도 없이 나는 울기만 하고, 그런 나를 우진이는 보고만 있
었지만 그날 이후, 우리는 친구에서 연인이 되었다.
10살에 친구로 만나 25살에 연인이된 우리. 하지만 지금도 10살의 그
때처럼 때묻지 않은 어린애같은 그. 나는 이제서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정말로 그를 사랑한다고…
그리고 그날 선물받은 C컵짜리 야한 속옷은 내방 서랍속에 고이 보관
되어 있다. 나중에 그를 닮은 아기를 낳고 아줌마가 되면 그 속옷을
입고 그를 한 번 유혹해 보리라는 내 굳은 결심과 함께…
By 삐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