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민] 내 인생 최고, 최악의 식당

근 4년 동안 내 인생을 말아먹고 있는 프로그램 [리얼코리아]의 간판은 ‘그곳에 가면’. 바로 서울, 경기 인근의 식당 소개 코너다. 이 코너를 시작할 때 PD들과 작가들의 의욕과 의도는 사뭇 남다른 데가 있었다. 강산의 8할은 변했을 시간 동안 허다한 식당들을 찾아 다녔다. 그 중에는 정말 내가 왜 여길 찍고 있을까 싶은 ‘폭탄’도 있었고 한 시간짜리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라는 타이틀 붙여 내고 싶은 곳도 간간히 있었다. 그 와중에서 느낀 점이라면, 식당이란 참으로 다양한 군상들이 몰려드는 곳이며, 관찰자 시점으로 하루 이틀 정도 자리잡고 있다 보면 우리 주변의 숨겨진 이면들이 곧잘 발견되는 곳이라는 것이다.

삼각지 근처의 국수집 하나를 촬영했을 때의 일이다. 이 집 주인 할머니는 참 푸짐한 분이셨다. 손님이 먹는 거 봐서 양이 조금 적어 보인다 싶으면 말 하지도 않았는데 그릇 뺏아가서 풍성하게 다시 담아 주는 그런 스타일이셨으니까. 가게도 할머니를 닮았다. 카운터도 따로 있지 않고 돈통이 물컵 놓는 선반에 함께 놓여 있어서 손님들이 알아서 돈을 그 안에 놓고, 더한 경우는 잔돈까지 알아서 세어 가는 진풍경이 이따금 보여지곤 했던 것이다.

보통 손님들에게 음식 맛이 어떠냐는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열이면 일곱은 거절하는 것이 보통이다. 빚쟁이에 지명수배자(?)에 옛날 애인 쫓아올지도 모르는 카사노바들이 어이 그리도 많은지. 하지만 그곳은 손님들까지도 푸근했다. 인터뷰를 거절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한 손님(그는 인터뷰가 가장 어려운 공무원, 그것도 국방부 공무원이었다)은 할머니와 국수를 두고 이렇게 얘기했다.

“음식 맛하고 할머니 마음씨하고 똑같아요. 최고죠.”

오랜 동안 기억에 남을 국수집이었지만 이 식당이 내 뇌리에서 빼낼 수 없는 추억으로 박혀들게 된 것은 오히려 방송 다음날에 생긴 일 때문이었다.

사무실 전화가 울려서 무심코 받았다. 40대 정도의 남자 목소리. “삼각지 국수집….”이라는 말만 얼핏 듣고는 기계적으로 그곳 전화번호를 읊어 주었는데 이 아저씨가 간절한 목소리로 거기 갔다온 PD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고 했더니 이 아저씨 갑자기 감동에 젖은 목소리로 연방 외쳐 댄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아들인가? 아니지. 어제 식구들 다 인사하고 왔는데 이런 사람은 없었다. 조심스레 누구냐고 물으니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저는 그 할머니 때문에 인생이 바뀐 사람입니다.”

인생이 바뀌다니? 국수집 때문에? 조금 황당한 생각이 들어 심드렁한 말투로 되물었다

“인생이 바뀌다니요?”

그러자 그 아저씨 아직 감동의 물결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그의 기나긴 사연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그는 15년쯤 전,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털어먹고 설상가상으로 아내까지 그의 곁을 떠나 버리는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 실의에 빠져 술로 세월을 보내다 보니 알콜중독까지 겹쳐 가족까지도 내다보지 않는 쓰레기 인생이 되어 용산역 앞을 배회하는 서글픈 인생이었다는 것이다(요즘 말로 ‘노숙자’다).

하루는 배가 너무 고팠다. 평소엔 술 먹으면 밥 생각은 아니 났는데 그날따라 ‘배가 목을 당기는 것처럼’ 먹을 것을 찾더란다. 하지만 그날 따라 주머니엔 땡전 한 푼 남아 있지 않았고, 용산역에서 길따라 난 식당들에 들어가서 밥 한 그릇만 달라고 통사정을 해보았지만 그는 대부분의 가게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얼음장같은 문전박대에, 어디는 소금을 뿌리고, 어떤 집은 개를 풀겠다고 위협하고, 진짜 살벌한 집은 우락부락한 주인이 “집어던져 버렸다”고 한다.

처음엔 정말 서글픈 마음으로 밥 한 술 얻어먹으러 나섰지만 나중엔 오기가 치솟았다. 왜 아라비안나이트에 보면 천 년 동안 항아리에 갇혀 있던 마인이 500년 동안은 구해 준 사람에게 은혜를 갚을 생각을 하지만, 그 뒤엔 오기가 나서 다 죽여버리겠다고 결심한 이야기가 있지 않던가. 비슷한 오기로 그는 용산역 인근 식당을 일일이 다 들어가보고 “몽땅 그렇게 나온다면 밤에 휘발유 뿌려 불질러 버리고 자기도 죽어버리자”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 예비 방화범의 발걸음은 삼각지 화랑가 작은 골목에 있는 할머니네 국수집까지 이어졌다. 쭈뼛쭈뼛 들어서자마자 할머니는 자기 몰골을 보고도 환하게 웃으면서 “어서 앉아요” 하더란다. 그리고는 국수를 말아 주는데, “태어난 후 그렇게 입에 단 음식은 처음”이었단다. 허겁지겁 국수를 배로 퍼 넣고 있는데 할머니가 갑자기 그릇을 빼앗아 갔다. 놀라 할머니를 바라보니, 할머니는 삶은 국수를 더 담고 국물을 한가득 다시 따라 주었다.

“먹는 품 보니까 한 그릇으론 안되겠어. 거 참 맛있게 먹네”

거의 두 그릇 양은 됨직한 국수를 굶주린 뱃속에 털어넣은 뒤에야 그는 고민을 시작했다. 원래는 나 돈 없슈, 배 째슈 할 생각이었지만 할머니의 풍성한 마음과 웃음을 본 다음이라 그런 무도한 짓을 할 자신이 도무지 생기지를 않더란 것이다. 그래서 이 아저씨 그냥 말없이 도망가기로 했다. 할머니가 다른 국수를 삶는 틈을 타서, 그 딸이 잠깐 뭐 사러 나간 사이를 이용해 그는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때 할머니가 뒤꼭지에 대고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국수 먹고 힘난 다리를 기운차게 놀리며 줄행랑을 쳤다.

한참을 도망가서 용산 소방서 앞에 이르러 헉헉대면서 숨을 돌리고서야, 귓전에 걸려 있던 할머니의 외침이 머릿 속에 들어왔다. 테이블을 걷어차면서 문을 박차고 도망가던 그의 뒤통수에 대고 날린 할머니의 외침은 바로 이 세 마디였다.

“그냥 가! 뛰지 말아! 다쳐!”

“어디 가? 거기 서! 돈 내놔!”쯤으로 흘려들었는데 그 엉겁결을 지나고 보니 할머니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떠올랐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자신이 돈을 내지 못할 것을 미리 알고도 친절하게 맞아 주었고, 국수 한 그릇 더 퍼 주면서 웃어 주었고, 배은망덕하게도 말 한 마디 없이 도망가는 그에게 뛰지 말라고 외쳐 준 것이다.

그날 그 아저씨는 용산역 앞으로 돌아가서 몇 시간 동안이나 울고 또 울었단다. 자신을 속이기만 해 왔던 세상과 세상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버렸던 아내와 가족들과 친구들의 얼음장 속에 숨막혀 가던 자신에게 그 할머니의 말 한 마디는 그야말로 숨구멍이었고, 따스한 불씨 한 조각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날 냉대를 무릅쓰고 본가로 돌아갔다. 몸과 마음을 추스른 후 파라과이로 홀홀단신 이민을 떠난 그는 “죽을 힘을 다해 살았고” 15년이 지난 지금, 파라과이에서 꽤 큰 장사를 벌이는 성공시대를 이룩해 냈다.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와 여기 저기 인사할 데를 찾아다니는 도중, 마침 TV에서 그 할머니를 봤다는 것이다.

한 끼니의 국수 한 그릇이 그렇게 큰 영생의(?) 음식이 될 수도 있음을,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나, 변두리 식당 주인, 그리고 그냥 대한민국의 장삼이사들도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인생에 크나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고리를 가지고 있음을 깨우치게 해 준 삼각지 국수집. 그곳은 그 어떤 미식의 향연장보다도 윗자리를 차지하는 내 인생 최고의 식당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나는 한 식당을 찾았다. 황태찜을 주 메뉴로 하는 자그마한 식당. 생긴지는 5년 밖에 안되었는데 그 사연이 가상하다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었다. 원래 IMF 이전에는 잘나가던 건설사 사장이었던 식당 주인은 IMF 때 모든 사업을 들어먹고 알거지가 됐다. 그 역시 자살까지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하는데 이번 위기의 구원자는 그의 아내였다. 아내는 남편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고, “당신이 해 온 만큼만 하면 무얼 해도 자신 있어요.”라고 수시로 최면을 걸어줌으로써 공사판 함밥만 먹던 남편을 주방장으로 탈바꿈시켜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장사도 꽤 잘된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는 자리가 없을 정도라니…

촬영을 시작했다. 아니나다를까, 그 두 부부는 상상을 초월하는 닭살부부였다. 말끝마다 남편에 대한 사랑타령이요 말머리마다 마누라 자랑이니, 내 눈꼴은 물론이요 카메라 렌즈 눈꼴까지 시어서 못봐줄 지경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다정한 남녀를 보면 웬지 심술나는 이상성격의 나는 냅다 한 마디 질러 버렸다.

“거 두 분 금슬 좋은 거 알겠으니 그만 좀 합시다.”

그러자 남편은 조금도 당황한 빛 없이 너털웃음 지으며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허허 워낙 생사고락을 같이 하다 보니… 지금은 얼마나 사랑스러운데요.”하며 아내가 얼마나 자신한테 큰 힘을 줬는지에 대해 또다시 녹음기를 틀어댈 기세를 보이자 나는 저만치 도망가 버렸다. 하지만 나이 40대 후반에 그토록 아내를 사랑하고 또 그것을 몸으로, 말로 표현하는 사람이 어디 그리 흔할까 싶은 마음으로 그를 너그럽게 용서하기로 했다.

그러던 차에 교복을 입은 그들의 딸이 “엄마!”를 외치며 주방 안으로 들어왔다. 야무지게 머리를 땋아내린 것이 그 엄마를 쏙 뺐다. 나는 문득 심술이 돋아서 그 딸을 돌려세웠다.

“어이 딸… 엄마 아빠 닭살이지?”
“헤헤 그럼요. 가끔은 제가 질투날 정돈데요 뭐. 그래도 좋아요. 나도 시집가면 저렇게 살 거예요. 천생연분이잖아요.”

“……..” 숫제 말을 막아 버리는 저 간악하도록 이쁜 딸내미를 보라. 주방에 들어와서도 연방 아빠에게 아양떨고, 엄마에게 돈 달라고 투정 부리고, 손길 바쁜 부모들은 그 와중에도 흐뭇한 웃음과 부드러운 대꾸를 놓치지 않고… 이 가정이 5년 전 자칫하면 아빠가 세상을 버릴 위기에까지 몰렸던 위험한 가정이었던가. 나는 문득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래서 닭살 아내에게 문득 존경심이 쏠렸고, 이 가정의 행복을 카메라에 담게 된 기쁨이 불현듯 뿌듯하게 가슴을 채우기 시작했다. 갑자기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하는 ‘상록수’의 한 소절이 귓가에 들려오면서, 크게 웃고 있는 세 가족의 얼굴을 그 위에 오버랩시킬 상상까지 하니 콧날이 시큰해졌다. “국민 여러분 IMF는 극복되었습니다.”

방송은 잘 나갔다. 제목은 “요리사가 된 건축가”. 내부 평도 좋았고, 심의 역시 ‘알콩달콩 살아가는 부부의 이야기가 잘 반영…’ 어쩌고 저쩌고로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역시 방송 다음날 오후 발생했다. 다른 아이템을 촬영하느라 열심히 카메라를 돌리고 있던 내 핸드폰이 발악을 하듯 온몸을 떤다. 촬영 중 습관대로 계속 무시하고 있는데, ‘너 안받으면 후회한다’는 듯이 5분동안 진동을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마지못해 핸드폰을 여니, 한 작가의 아우성이 귀를 뚫는다.

“선배! 어제 그 식당 주인 있죠? 그 사람 본처한테서 전화왔어요.”
“뭐가 어쩌고 어째?”

득달같이 카메라 놓고 알려준 번호를 누르니 흥분이 채 식지 않은 어떤 중년 부인이 전화를 받는다. 신분을 밝히자마자 퍼부어지던 흥분된 육성을 모면하고 자초지종을 청하니 대충 이런 것이다.

“나, 그 사람하고 13년 살다가 IMF 때 그 사람 부도나고 빚잔치하면서 위장이혼했어요. 아들 둘이 눈 시퍼렇게 살아 있다구요. 이 때만 넘기면 다시 합치자고 두 번 세 번 다짐하더니 언제부턴가 소식도 없더군요. 그래도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방송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어떻게 그런 사람을 방송에 내보낼 수 있어요? 지금 아들 둘이 난리예요 칼 들고 방송국에 간다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나 역시 기절할 것 같은 몸을 가누면서 문제의 식당에 전화를 걸었다. 받은 사람은 문제의 닭살 부부 중 아내.

“이게 대체 어찌 된 사연입니까!”
“아… 그거 별 문제 아니에요. 신경쓰지 마세요.”
“뭘 신경쓰지 말아요? 난리가 났는데…”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거-든-요. 그-럼 된- 거 아-니-에-요? ” 음절 하나 하나를 똑순이처럼 끊어 말하는 그녀에게 나 역시 분노로 가득찬 스타카토를 날렸다.
“남-편-인-지 누-군-지 빨-리 바-꿔-요.”

사태는 너무도 쉽게 파악되었다. IMF 때 위장이혼한 뒤 홀로 지내다가 그녀와 눈이 맞았고, 그녀와 함께 식당을 차렸고, 그 딸은 새 여자의 딸이며, 아직 둘은 혼인신고가 되어 있지 않은 동거인 상태였다. “18년 동안 한 번도 싸움하지 않은 잉꼬부부”와 “IMF를 맞아 자살까지 생각하다가 아내의 격려에 힘입어 탈출”했다는 것은 모조리 가공의 이야기였다. 심지어 “나도 시집가서 저렇게 살 거예요.”라는 딸의 멘트까지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다”지만 그들은 분명 사기를 친 것이고, 나는 그 사기에 꼼짝없이 걸려든 물고기가 됐다. 어디 나 뿐이랴. 방송을 보며 ‘그 부부 참 예쁘게 산다’면서 흐뭇하게 웃었을 수십 만 내지 수백 만의 시청자들까지 ‘멍청한 PD’ 탓에 그 사기의 피해자가 됐으며, 방송을 통해 “금슬 좋은 부부”가 공증된 마당에 저 한 구석에 처박힌 본처와 아들들은 졸지에 “정부(情婦)와 사생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나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이미 나간 방송을 도로 송출실로 불러들일 수는 없었다. 문제가 더 커지게만 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본부인의 분노를 남편에게 돌리고 우리도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수 밖에. 그러던 차에 문제의 ‘두 여자의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직 할 말이 남으셨어요?”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군요.”
“그럼 끊으세요.”
“저기… 인터넷에 다시보기인가 하는 것이 있다면서요.”
“그런데요?”
“아들놈들이 그걸 보면서 치를 떤다는군요. 이왕 나간 방송이야 그렇다 치는데 사람들이 그걸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보면서… 그거 지워 달라고… 안그러면 어떻게 할 지 모르겠다면서…”
“방송이 장난인 줄 아십니까? 이만 끊겠습니다.”

전화는 끊었다. 하지만 고민은 시작이었다. 방송의 ‘다시보기’를 삭제한다는 것은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닐뿐더러, 층층시상의 선배들과 간부들, 그리고 동영상 관리팀에게 자문과 도장을 받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우리의 법적인 책임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한 이 경우에 있어 방송 ‘공신력’의 손상을 주장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보상을 받든 지지고볶든 자기들끼리 해결할 문제를 왜 우리에게 가져오느냐”는 볼멘소리에서부터, “너, 그거 삭제 요청하는 건 PD임을 포기하는 거다”라는 못박기까지.

기실 냉정하게 말해서 그 본처와, 아들 둘과, 두 여자의 남편과, 또 한 여자,와 그 여자의 딸이 어떻게 죽이고 살리든 나에겐 아플 것도 없고 간지러울 것도 없는 문제였다. 애써 외면하기로 한다면 그저 잠시의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잘못한 부분은 오로지 혼인신고 안된 동거인을 부부로 일컬은 것 밖에는 없었으므로. 또 일점일획의 명예훼손이나 타인에 대한 비방도 없었으므로. 게다가 그 본부인과 아들 둘의 실체를 알지도 못했거니와 그들을 무시하지도 않았으므로. 엄밀히 말해, 그것은 ‘그들의 문제’였고 내 머리를 쥐어뜯을 필요는 누구 말마따나 추호도 없었다. 하물며 나의 길지 않은 방송생활 중 최악의 쓴맛을 보게 한 그 가증스런 주인에게 뭘 어떻게 도와 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나는 선배에게 “개새끼” 소리를 들어가며, 동영상관리팀에게 싸늘한 질문과 “똑바로 하라”는 지청구를 받아가며, 문제의 부분을 삭제해 달라고 간청해야 했다. 그 이유는, 나 스스로 감동을 받았던 삼각지의 국수집에서 “인생이 바뀌었던” 한 사내의 목소리가 떠올라서였다. “그 할머니의 말 한 마디가 내 인생을 바꿨죠.”

사람들은 하루에 자신들이 내뱉는 수백 마디의 말과 벌이는 행동들의 의미를 까먹고 살아간다. 아마 국수집 할머니조차 도망가던 아저씨의 뒤에 대고 뭐라 외치던 날의 기억을 잃어버렸을지 모르고, 그날 그 아저씨에게 험악한 욕지거리와 함께 “아침부터 재수없이…”를 던졌던 식당 주인장들의 머릿 속에도 그 아저씨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들은 한 사람의 인생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고, 국수집 할머니는 영문도 모르는 가운데 한 사람의 인생을 나락에서 건져냈다. 이렇게 두고 보니 나에겐 아무 상관도 없는 동영상 6분 30초짜리지만, 그것이 한 사람, 아니 서너 사람의 인생을 들었다 놨다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데 내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렇게 내 인생 최악의 식당과는 인연이 끝났다. 그 뒤로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고 나 역시 그쪽으로는 눈길도 귓길도 준 적이 없다.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원망스러울 뿐인 “두 여자의 남자”인 식당 주인이, 악연이든 길연이든 맺어진 그의 식솔들에게 더 이상 연기가 아닌, 진실로 좋은 남편과 아버지로 자리매김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미 그러기엔 너무 가 버렸지만) 그리고 내가 꽤 어렵게 지워준 6분 30초의 동영상이 그들의 과거에서 빨리 잊혀지기를 바랄 뿐이다.

원문- http://www.cultizen.co.kr/site/pickup.htm?Pickup_code=104